관찰일지[観察日誌]/본인관찰일지(에세이)

[에세이] 자판기의 추억 1편 _ 오사카 시리즈(1)

황구름 2020. 10. 6. 00:43
 자판기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어떤 장면입니까?

 

이 질문을 듣는다면 나는 2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첫 번째는 군대에서 동기들과 항상 뽑아먹던 '커피자판기'. 두 번째는 오사카도착 다음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혼자 음료를 뽑아 먹었던 '무인 판매기'이다. 

 

 사실 여기서 군대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번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면서 거쳐간 평택역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지하철을 기다리다 발견한 커피자판기를 보자 퍼뜩 그 두 가지 장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더랬다. 사실 지금에야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새내기, 군 복무 시절까지 나와 내 친구, 지인들은 항상 커피 자판기를 가까이했었다. 중학교 때는 주머니에 천 원 한 장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대개 준비물을 사다 남은 100원짜리 동전들을 넣고 다녔었는데 추운 겨울 속셈학원 앞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뽑아먹던 코코아 한 잔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꼬맹이었던 우리들 중에서도 어른이랍시고 굳이 밀크 커피를 뽑아먹는 친구도 있었지만(중학교 당시에는 커피맛을 잘 몰랐다, 지금은 없으면 죽는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코코아나 율무차를 마셨다. 단돈 100원에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 달달한 사치는 매일 손바닥을 맞아가며 교과서, 문제집을 외우던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종의 힐링 타임이었다.

 

 그 후 대학교에 올라가서도, 또 군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자판기 앞으로 몰려가 200원으로 오른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셔가며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손과 입에 담배 냄새가 배는게 싫어서 지금까지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도 그 따끈한 자판기 커피의 달달함은 이기지 못하고 멀찍이서 호록호록 종이컵을 빨아가며 친구들과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겨울바람이 차가울수록 더 맛있어지는 마법의 커피는 군대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부대에는 겨울에 춥지 말라고 비닐하우스 구조의 작은 휴게실을 만들어놓았는데 동기들이 전부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나 역시 휴게실에 들어가지 않고 산에서 내려오는 칼바람을 맞으며 호록호록 자판기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있다. 나를  포함 총 3명의 동기 중 나를 제외한 두 명이 부산, 울산 사나이들이었는데 항상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 눈치를 보며 "춥제?"라고 툭 한마디 던지고는 끝까지 피지도 않는 담배를 툭툭 털어서 끄고는 서둘러 들어가곤 했다. 나 같으면 다음번에는 담배를 피우는 자기들끼리만 나가서 필 법도 한 데 3번에 한 번은 꼭 나를 불러서 "담배 한 대 피울 건데 같이 가자~"라고 데리고 나가곤 했다. 그리고 때때로 미안하다며 커피를 뽑아주곤 했는데 그때는 그 마음이 참 좋아서 추운 겨울에도 벌벌 거리며 함께 자판기 커피를 마셨던 것 같다.

 

 이렇게 자판기 커피는 내 안에서 참 따뜻한 기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벌써 10년도 넘은 기억이지만 평택에서 만난 커피 자판기를 보자마자 그 때의 추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사진을 한 장 찍고 지하철에 올라탔다.

 

 

#이제는#한잔에#300원#이럴수가

 

 두 번째 자판기는 내가 29살이 되던 해에 나름의 포부를 지니고 일본 오사카로 떠난 그 날 만났던 자판기이다. 당시 여러모로 힘든 일들을 겪고 한 동안 몸도 아팠던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결심은 분명 맹목적인 이유가 아닌 복합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불안정했던 내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택한 도피처였을 수도 있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한 번 해보자라는 막무가내식 도전 정신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가진 돈도 없었던 나는 아버지에게 200만 원을 빌려서 오사카 워킹홀리데이 계획을 세웠다.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하자마자 바로 비자 신청서를 작성하고 대사관에 가서 인터뷰를 봤다. 예상 질문들을 미리 일본어로 정리해서 갔기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고 실제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도 슥-하고 발급을 받았다. 그 날 바로 오사카로 가는 편도 비행기표를 끊고 카페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셰어하우스를 구했다. 모든 것이 척척 진행되고 있었고 마치 내가 그때 일본에 넘어가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2015년 3월 25일의 하늘

 

 얼마안되는 짐을 싸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넘어갈 때 이상하게도 나는 꽤 담담했다. 일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됐었고 언젠가는 꼭 일본에 넘어가서 마음껏 여행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늘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거진 10년 만에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 치고는 제법 담담하게 간사이 국제공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물론 설레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고 지금도 일본에서 찍은 사진을 다시 보고 있자면 가슴 한편이 저릿 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감정은 단순히 설렘만이라기보다는 이제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삶에 대한 부담감과 앞으로 2~3주 정도의 생활비밖에 남지 않았다는 현실적인 압박감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 감정이 분명 여행의 감정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 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 귀국 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한참 후 친한 친구와 함께 다시금 오사카에 여행을 갔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두 감정이 조금은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다.

 

 

#현상수배전단지#많이잡혔길바람

 

 간사이 국제공항에 내려서 셔틀버스를 타고 지하철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내 눈에 띄었던 건 다름이 아닌 현상수배범 전단지 였다. 그 이유는 지금도 잘은 모르겠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구나' 싶었다. 강도, 살인, 사기 등등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이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똑같은 동네에 내가 왔구나 싶었다. 그 사람들 중 얼마나 잡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단지는 뒤로 하고 내가 구한 셰어하우스가 있는 동네에 가기 위해 텐가차야 역(天下茶屋駅)으로 향했다. 사실 예산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순전히 가격만 보고 구했던 집이었기 때문에 그 위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구글맵으로 미리 검색해 봤을 때도 '뭐 저 정도야'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실제로 찾아가다 보니 집은 꽤 오래된 동네에 위치하고 있었다(그 동네가 오사카의 스즈란이 있던 동네였다는 사실을 조금 더 지난 후에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