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일지[観察日誌]/본인관찰일지(에세이)

[에세이] 뜻 밖의 선택이 주는 뜻 밖의 즐거움

황구름 2020. 9. 15. 23:08

 내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일단 날씨가 너무 좋고... 바람이 시원하니까요...?"

 

정말이다. 이건 어설픈 김현중 코스프레가 아니야.

시기는 9월 중순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나는 종로 3가에서 수업을 듣고 3시에 끝나 저녁까지 시간은 충분했고, 내 눈에 '따릉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2주 전에 따릉이 1달 이용권을 결제하고 바로 태풍이 와서 한 번도 이용하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끔 정처 없이 걷는 일, 특히 내가 모르는 장소를 정처 없이 걷는 일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게다가 모르는 곳에서 충분한 시간을 정처 없이 걷는다는 것은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충분 그 이상의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어딘지는모른다#연세대라고적힌이정표가보였다

 가양대교까지 가면 집에 찾아갈 수 있다. 그게 내가 가진 목표의 전부였다. 정말로 가양대교까지만 가면 집까지 찾아갈 자신이 있었다. 집에서 따릉이를 타고 가양대교까지 달렸던 적은 충분히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기억해냈어야 했다. 구글맵에서 제주도를 보고는 '뭐야, 제주도 별로 안 넓네 렌트는 무슨 걍 걸어보자'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3월 제주도에 방문했다가 아무리 걸어도 민가가 나오질 않아 얼어죽을 뻔했던 그 날의 기억을...

 

#대한민국에서#처음보는동네

 딱 여기까지 오면서 온갖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충동적인 출발이었다고는 해도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나라라는 사실'을 절절히 몸으로 배워가며 달려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의 내리막길도 있었지만 내가 등산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자전거 도로가 있다는 카카오 맵을 믿으며 여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혹 자전거를 끌며 달려오긴 했지만 이땐 정말 지쳤었다. 특히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으니 이미 내 얼굴은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위의 길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는 길을 발견하고 나서는 지금까지의 고된 시간이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다리에#그림#이것이#서울의복지입니까

지금까지의 구불구불 울퉁불퉁 상승상승의 길들과는 다르게 제대로 정비된 자전거 전용도로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어딘진 모른다(홍제 시장을 지난 건 기억난다). 하지만 쾌적한 공기와 다리 기둥에 걸려있는 그림들로 내 마음은 이미 충분히 풀어져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난 더욱더 굉장한 것을 보게 된다.

 

#아니도시한복판에#폭포라구요#서울복지#무엇

 인정한다. 난 충청도 촌놈이고. 내가 살던 동네에 이런 인공폭포는 본 적도 없다. 물론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생활권에는 없었다. 그런데, 엄청 꼬불꼬불 상승상승한 길을 헤치고 나와보니 이런 인공폭포가 있다고?! 서울은 어드벤처를 위해 만들어진 곳인가요? 내 반응이 과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폭포를 발견했을 때는 정말 감격스러웠다. 정말 여기까지 오는데 1시간이 걸렸고 나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나의 충동적인 결단에 대한 보상으로는 차고 넘치는 광경이었다.

 

#이거시#청계천인가요#아니면#그냥서울에있는천인가요

 예전에 오사카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머무를 때,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은 구글맵을 켜고, 나의 애마(자전거)를 타고 오사카 남부를 누비는 거였다. 난바를 중심으로 오사카의 북쪽은 말 그대로 번화가다. 더 올라가면 신오사카가 나오고 온갖 높은 빌딩들과 신축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오사카의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느낄 수 있는 건 오사카라는 '마을'이다. 물론 공장단지도 있지만 대게 낮은 건물들과 소박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나는 그런 남부지역을 구석구석 누비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이건 검색해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니까. 나는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비고 그 거리의 사람들이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때, 나는 그 거리에 녹아드는 기분이 들었고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다른 나라를 여행 가면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그 거리 자체를 걷는 걸 가장 좋아한다. 코로나가 쳐들어오고 해외여행이 많이 어려워진 현 상황에서 이름 모를 거리와의 만남은 그때의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그때는 삐걱거리는 따릉이를 타고 있지도, 땀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스크도 쓰고 있지 않았지만 서울에 올라와서 오랜만에 길을 지나가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왔다#한강#초입

 결국 나는 가양대교를 사진으로 찍지 못했다. 위의 사진은 한강 옆 도로로 진입하는 초입 구간이다. 가양대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는 2시간 정도 쉬지 않고 달렸으며 허벅지는 터질 것 같았고 사진을 찍을 정신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어서 집으로 가서 샤워를 하고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금도 나의 허벅지는 쑤시고(내일이 너무 걱정돼....) 눈꺼풀은 무겁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나는 약 2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시간을 보낸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를 괴롭히는 온갖 현실로부터 멀어져 평소에도 수 백번 씩 드는 쓸데없는 걱정들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오로지 힘들어하는 폐와 무거운 허벅다리에만 집중을 할 수 있었다. 근래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머리가 맑아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정말로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2020년 9월 15일에 문득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충동'은 분명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항상 지끈거리는 내 옆통수를 위해 내 몸이 보내는 구조신호였을지도 모르고, 집에 박혀 사느라 잊고 있었던 이 즐거움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내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뜻밖의 선택이었는데... 뜻 밖 그 이상의 선물을 받아버렸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즐거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