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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통대생의 육지 적응기 _ 하알 말이 없네에 _ 20240107

황구름 2024. 1. 30. 23:04
#돌아오는 길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현재 다니는 회사만큼 일본인들에게 둘러싸여 일하는 환경이 많지가 않다.

 우리 부서 특성상 항시 10명 가량의 일본인들이 사무소에 상주하기 때문에 비교적 일본어 연습을 하기 우수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고로 나는 직장 내에서 당당히 회화 연습을 시도하는 편인데... 워낙 사무실 분위기가 조용하다 보니 솔직히 쉽지만은 않다.

 일본인들이 모여서 앉아 있는 책상에서 한발치 떨어져 있는 나의 자리. 만약 내가 과감하게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이동해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면? 안 그런 척 해도 다른 일본인들이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기에 보통은 업무적인 용건이 있을 경우 혹은 한두마디의 짧은 농담 정도가 최선이다.

 자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일본인들이 내 자리로 와서 말을 걸게 만드는 것.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신입과 베테랑의 나이차이가 꽤 나는 사무실. 50~60대 일본 아저씨들이 굳이 나와  수다를 떨러 올리는 만무하고 20대 젊은 일본인 직원들은 그 아저씨들의 눈치를 본다. 본인들끼리도 수다 떨기 어려운 환경에서 굳이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다.

 하지만 언제나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단 법. 탕비실 같은 장소에서 조금씩 화제거리를 던지며 농담 따먹기를 시도한 지 반년이 지났을 때... 그나마 조금 짬 좀 찾다 하는 일본인 직원들이 간헐적으로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력직이라 터치할 사람이 없는 검품팀에 호시상은 심심할 때마다 나를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의 일본어 실력이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잘 나오던 말문이 막히고 심지어 숨 막히는 침묵의 시간들도 찾아오곤 했다. 그 이유를 한참이나 고민했으나 의외로 너무나 심플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 서로 간에 할 말이 다 떨어진 것이다.

 초반에야 서로의 출신이나 취미 등 이것저것 이야깃거리가 있었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그마저 동이 나버렸다. 더군다나 일본인 직원들은 한국에 출장 와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출근하는 근무 지옥에 빠져있는 상황. 새로운 에피소드가 생겨날 리 만무했고 소소하지만 뜨뜻미지근한 생활을 즐기는 나 역시 주제가 급속도로 줄어들어갔다.

 가끔식 말을 걸어오는 60대 아저씨가 신나서 말을 걸러왔다가 풀이 죽어 돌아가는 사태가지 벌어졌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내 일본어 실력이 부족해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물론 이것도 맞긴 하는데) 그냥 할 말이 없어서 말을 못 하는 거구나.

 물론 한국어로 대화하면 훨씬 다채로운 대화가 가능한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재료가 있어야 요리를 하지 않겠는가. 가진 게 라면뿐이고 그 라면마저 다 떨어져 부스러기만 남은 상황에서 맛있는 요리를 기대한다면 그건 기대한 사람의 잘못이 아닐까...?

 대화(対話)란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 성립하는 법. 애초에 서로 할 이야기가 없는데 무슨 회화연습이 되겠는가. 이 단순한 진리를 일본어 연습이라는 맹목적인 목적에 사로잡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나는 항상 한가지에 몰두하면 한 가지를 잊어버리곤 하는데... 이번에도 딱 그 꼴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어깨에 힘을 빼고, 평소에 야금야금 생각해 놨던 주제들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최근에 들어온 22살의 신입이 뉴진스를 좋아해 강남 팝업스토어까지 다녀오던데... 솔직히 30대 중반의 아저씨는 그 이야기를 따라가기만도 벅차지만 이 또한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흔히들 '침묵은 금'이라고 하지만 통역을 하는 사람에게 '침묵은 독'일지도 모르겠다. 내일도 열심히 떨자. 쓸모 있는 수다를.